여우비
etc.써머2024-09-16 20:51

사랑을 아직 난 몰라서 더는 가까이 못 가요
근데 왜 자꾸만 못난 내 심장은 두근거리나요
> 백언을 사랑하지만 집안에서 정해준 사람과 혼례를 올린 세휘 제가 품은 연심이 실로 사랑이었던가⋯ 부정하느라 스스로 사랑을 모른다고 단정하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은 세휘도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다는 것, 모두를 위해 제 진심을 감춘 희생한 것임을 알려주는 상징 (마음은 거짓말하지 않으니까)

난 당신이 자꾸만 밟혀서 그냥 갈 수도 없네요
이루어질 수도 없는 이 사랑에 내 마음이 너무 아파요
> 혼례를 올리는 날까지 백언랑 생각뿐이 안 나니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낸 세휘 혹여나 저를 데리러 오진 않을까 혼인식이 시작하기 직전까지 제가 걸어온 흔적을 뒤돌아볼 듯 오늘을 넘기면 다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임을 알기에 짙어지는 소녀의 간절함

하루가 가고 밤이 오면 난 온통 당신 생각뿐이죠
한심스럽고 바보 같은 날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
> 겉으로 번지르르한 신사의 낯은 혼인을 치르고 난 뒤에 벗어질 가면이었던 걸 세휘도, 그 누구도 알 길은 전혀 없고⋯ 이 남자는 실로 세휘를 사랑한다거나(본디 정략혼이라는 것이 사랑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지만 부부의 가약 맺은 후 초반엔 낯간지러운 사랑을 속살거린 것도 모두 거짓으로 점철된 것이었음), 그녀를 부인으로 존중한다거나 그런 거 하나 없이 제한하는 것들이 많아짐 꽃구경, 승마, 악기 연주 그리고 활을 쏘는 걸 즐기던 자유로웠던 세휘가 새장 속에 갇힌 새 신세가 되고 자유로운 천화당 아기씨의 모습을 잃게 되는 과정을 한심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자책하고 웃음만이 가득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곤 할지도...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 못 해 오라비에게는 더, 걱정 끼치긴 싫으니까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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마음이 사랑을 따르니 내가 뭘 할 수 있나요
이루어질 수도 없는 이 사랑에 내 마음이 너무 아파요
> 혼인한 몸으로 백운선원에 드나들 수는 없으니 유일한 숨구멍은 비천택에서 열린 수장들 회의뿐이었고 그날을 기다리는 건 세휘의 마음이 잊지 못한 사랑을 따르기에 행한 대담한 행동이었음 비록 백언랑을 만난다 해도 그는 나를 깍듯이 대했고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⋯ 어쩌다 비천택을 향하는 게 백언랑을 만나러 가는 것임을 알게 된 남편은 인적 없는 밤 산책이나 하자며 연못가로 데려가 세휘 빠트려 죽임

하루가 가고 밤이 오면 난 온통 당신 생각뿐이죠
한심스럽고 바보 같은 날 어떻게 해야 하나요
> 연못에 빠져 천천히 가라앉으면서 세휘는 좀처럼 살고자 발버둥치지 않을 것임 이미 지칠 대로 지쳤으니까⋯ 이대로 눈 감으면 다시 자유로워지려나 싶으면서 눈을 감는데 죽는 그 순간까지 백언랑을 사랑했던 그 기억들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눈물 흘리며 생을 마감할 것 같은데 ⋯ 죽는 순간까지 이루어지지 못한, 차마 마음조차 전하지 못한 제 사랑이 원념이 되어 이승을 떠돌게 되고 세휘의 시체가 떠오른 그 연못에서 젊은 여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아이들의 말들을 타고 타고 괴담이 되지 않았을까 세휘가 죽은 곳에서 시작된 괴담에 이상한 점을 느낀 설영랑이 대랑께 허락을 구하고 제 잔꾀 부려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는 데서 진실은 밝혀짐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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내 아픔이 무뎌져 버릴 날이 언제쯤 내게 오긴 할까요
한심스럽고 바보 같은 날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
> 세휘의 무의식에 품은 원념이 강한 탓에 도화랑처럼 형체가 있는 지경에 이른 덕에 설영랑은 조금 수월했을 법도 하네 제가 백호영도에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친동생처럼 이것저것 챙겨준 사람이니 세휘가 마음을 쉽게 열 수 있었을 테고 세휘의 원념의 근원과 설영랑 억울하게 죽은 세휘와 세휘가 아직 이승을 떠도는 이유까지 알게 됨 태어나길 고운 성정의 세휘 어린 아이들이 저처럼 연못에 빠져 죽는 아픔은 겪지 말았으면 하는 데서 머물렀다는 걸 듣고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님 제 마음 하나 제대로 못 전한 주제에 그 사람을 타인의 부인과 밀회하는 자로 만들었으면서 속죄하지는 못할망정 이승을 떠도는 게 한심스럽지 않냐며 마지막으로 백언랑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말에 고민하는데 끝내 들어줄 듯

달빛이 너무나 좋아서 그냥 갈 수가 없네요
당신 곁에 잠시 누워 있을게요
잠시만 아주 잠시만
> 어째서인지 세휘는 저가 죽은 연못을 떠나지 못해 백언랑을 모셔 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서서히 이승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백언랑을 다시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며 연모했다며 사라질 거 같은데 세휘의 혼이 사라지면서 여우비가 내릴 거 같다⋯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 그렇지만 앞으로 영영 볼 수 없을 당신에 흘리는 눈물은 안도의 눈물 안녕의 눈물...


09.16 22:47